MRI, 그리고 폐소(閉所).

약 9년 만에, 또 다시 MRI 를 찍게 되었다. 내 나이가 돼도 이런 거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많을텐데, 난 벌써 몇 번째인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게, 지금까지 찍었던 MRI 모두에서, 심각한 이상 징후는 없었다. 경미한 손상이 한 건, 나머지는 모두 이상 없음.

물론, 이번엔 그렇진 못했다. 내 몸에 나타난 이상증상의 원인이 포착되었고, 다행히도 간단히 원인 제거가 된다고 한다.


이런 얘길 쓰려던 건 아니고.

MRI 때문에 병원에 가긴 했지만, 그저 날짜를 받으러 갔지, 바로 가자마자 MRI 촬영실로 들어가게 될 줄은 몰랐다. 미리 알았으면 마음이라도 단단하게 먹었을텐데(더 긴장했으려나?).. 의사를 만나자마자 일사천리로 진행하게 될 줄이야.

내 앞에 대기인원은 2명. 부위는 알 길이 없지만, 대략 시간을 보니 20여분 정도 걸리는 듯 했다. 첫 20분이 지나고, 내 바로 앞 환자가 들어갔다. 음악이라도 듣고 있었으면 좀 나았을텐데, 전화기마저 소지품 보관함에 넣어두고 왔다. 대기실엔 시계도 없고, 그저 멍하니 앉아있는 수 밖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들어가 기계에 앉으면서 담당 선생님께 딱 한마디를 건넸다.

“선생님, 제가 살짝..”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확히 저렇게 얘기를 했는데, 친절하셨던 선생님은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셨다.
의사는 ‘얼굴’로 진료한다는 얘기가 있다. 의사인 친구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그럼 난 어떡하냐?’라고 했던 적이 있는데.. 잘 생긴 얼굴이 필요하다는게 아니고, 믿음을 줄 수 있는 표정을 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요즘 의사들은 사실 환자 얼굴은 거의 보지 않는다. 그저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 선생님, 내가 그 말을 하자마자 내 상태를 아셨다. 이런 사람이 어디 나 뿐이랴.
그리고 한마디 건네주셨다.

“혼자 계시니까, 마스크를 벗으시면 조금 나으실 거에요.”

마스크를 벗는게 호흡에는 당연히 도움이 되겠지만, 내 마음을 편하게 한 건, 저 선생님의 대응이었다. 일말의 귀찮음도, 짜증도 없이(사실 이게 당연한 거긴 한데..), 의연하고, ‘좋은’ 얼굴로 날 대해주셨는데, 그게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또 하나, 헤드폰.

헤드폰을 낄까말까 1초쯤 고민하다가 착용했는데, 1번 타자로 사이먼 앤 가펑클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노래는.. 기억은 안나는데, 이미 반쯤 진행되고 있었다. 시작하는 상태에선 눈을 뜨고 있었는데, 기계 안 쪽은 아니었고, 밖이 보이는 상태였다. 이 정도면 괜찮겠네? 하고 생각하는 순간, ‘아니지, 이거 움직이잖아!’ 라는 현실이 폐부를 깊숙히 찔렀다.

그 즉시 눈을 감았다.
이게 세번째 도우미가 됐다.


두번째 노래는 Woman in love. 그리고, 또 뭔가, 뭔가.. Heal the World 도 있었고.. 모두 올드 팝이었는데, 총 5곡인가 6곡쯤 들으니 검사가 끝이 났다. 당일엔 노래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는데, 일주일쯤 지난 오늘, 생각 나는 건 두 곡 뿐이네. 물론, 검사 내내 눈은 감고 있었다.

MRI 검사를 무사히 마치는데 총 세가지가 나를 도왔다.

  • 첫번째, 담당 선생님의 친절하고 침착한 대응.
  • 두번째, 헤드폰에서 나온, 익숙한 음악들.
  • 그리고 가장 중요한, 눈감고 있기.

문득 문득, 눈을 뜨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눈을 뜨는 순간, 내가 좁은 공간에 속박돼 있다는 사실이 현실이 될테고, 이성 상실은 거의 즉각 반응이 오게 돼 있다. 따라서, 일부러라도 눈을 계속 감고 있었다. 그리고 음악에 집중했다.
음악은 두가지에 도움을 줬다. 첫번째로, 다행히도 내게 익숙한 음악들이었기에 잠시나마 ‘감상’을 통해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있었고, 두번째로는, 시간을 셀 수 있게 해줬다.

오래된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지금까지는 대부분 헤드폰 없이 그냥 귀마개만 하고 있었던 듯 하다. 그리되면,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할 수가 없어서, 내가 얼마나 더 이 갑갑한 공간에 쳐박혀 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고, 그게 공포로 변하게 된다.
음악은 ‘시간 예측’에 큰 도움이 됐다. 15분에서 20분쯤 걸린다는 담당자의 말을 토대로, 노래를 들으며 시간 계산을 할 수 있었다. 보통 상업곡들은 4분 내외이므로, 5곡에서 6곡이면 끝나겠구나 하는 계산, 그것이 주는 안도감.

거 참.. MRI 하나 찍으며 대단한 거라도 이겨낸 듯??

아무튼,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혹시라도 다음에 있을 일을 대비할 수 있게 됐다.

  • 음악은 꼭 듣고(내가 가진 음악을 틀어달라 할 수는 없으려나?)
  • 검사 내내 절대로 눈을 뜨지 말라!

폐쇄(閉鎖)공포증이 아니고, 폐소공포증(閉所恐怖症)이다. 폐쇄공포증이 맞다면, 고소(高所)공포증은 뭐라 해야하나?

Author: 아무도안

안녕하세요. 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