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엔 2022년 12월 31일에 써야 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 짓을 시작한 이후, 과업(?)을 완수하지 못한 건 그 날이 처음이다. 때를 놓치고 며칠 고민하다가, 그냥 저냥 미뤄버렸다. 누구한테 보여주려는 의도로 쓰지도 않는데, 굳이 내가 꼭 써야 할 필요가 있을까. 또 다른 굴레에 얽매이는 건 아닌가..
그러다가, 새해를 음력으로 미뤘다.
예전, 연하장을 쓰던 시기엔 이런 일이 잦았다. 크리스마스 즈음부터 쓰려고 하다가 결국 미루고 미뤄서 설이 다가올 때야 겨우 겨우 마무리.
그 일을 올해, 몇십년만에 다시 해보려고 한다.
사실, 계획은 10시쯤부터 시작하려고 세워놨었다. 그러다가 (잘 보지도 않는) TV 를 틀었는데, 어라? 송골매 콘서트를 하네??
그래서 그걸 보다가.. 결국 11시 반이 지나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송골매 콘서트는 별로였다. 쓸데없는 사연 소개, 없는게 차라리 나았을 자막. 여전히 어딘가 모자란 카메라 구도, 그리고 편집.)
자.. 그럼, 아주 간단히 2022년을 마무리 해보도록 하자.
12월 31일, 토요일이었다. 22년을 우울하게 보냈기에, 이 날은 그래도 뭔가 좀 다른 짓을 해보고 싶었다.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았기에, 한 대여섯시간 정도 뭔가 차분히, 조용히, 그리고 철저하게 나만을 위해 써보고 싶었다.
그러다 생각난게 서울 시립미술관이었다.
여기는 가본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됐다. 언젠가 갔을 때 특별 전시장에서 나눠준 포스터(?)가 내 방 구석에 아직도 붙어 있는데, 내 기억으로는 더운 여름이었던 듯 한데.. 그 때가 마지막이었는지, 그 다음에 또 갔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내 기억 속 시립미술관은 ‘겨울’이다. 그 감성을 남긴 글도 있긴 한데.. 아무튼 겨울. 덕수궁 옆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가로수가 털옷을 입은 모습부터 시작해서, 살짝 비탈길(계단이긴 하지만)을 오르면 저만큼 보이는, 조금은 이 땅과는 어울리지 않는 건축물. 그리고, 시끄러운 도심 속, 한적함이 가득 차 있는 곳.
그게 내 기억 속 시립 미술관이다.
낮 1시쯤 도착한 미술관은 거의 대부분 내 기억 속 모습들과 일치했다. 적어도 안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토요일, 낮. 그리고 말일이라 그런지, 북적북적, 살짝 소란스러움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여성 비율이 압도적이었지만, 생각 외로 남성도, 게다가 나같은 아저씨들도 몇몇 보여서 신기할 정도. 사실, 쉬는 날 낮에 미술관/박물관을 가본 적이 거의 없기에… 늘 평일 늦은 오후가 내 주 무대였기에 이런 인구밀도는 내 상상 밖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복잡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여유롭고, 한가하고, 적막한 공간을 상상했던 나는 ‘이런…’이란 감탄사뿐, 다른 표현은 떠오르지 않했다.
그렇게, 한시간 반쯤 그림 감상, 사람 감상, 그리고 음악 감상(31일, 32일)을 하다가, 여전히 산란한 마음을 머금은채 미술관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굉장히 오랜만에(거의 처음 아닌가?), 정동 극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돌아가려면 시청역으로 가야지만, 시간도 조금 남고, 일찍 집에 가봐야 좋을 일도 없기에 조금 걷고 싶었다. 정동 극장은, 사실 문화체육관이었는데, 이젠 그런 자취는 찾을 래야 찾을 수도 없고. 한국은 한국인데, 어쩐지 다른 나라인 듯한 착각에 잠깐 빠져버렸다.
그리고.. 걷고 걸어, 정말 몇십년만에 그 학교 앞에 가봤다. 졸업하고 거의 처음. 아니.. 대학교 때 잠깐 근처에서 술 마신 적이 있긴 하니까, 그걸 감안해도 수십년인데다가, 학교 정문을 바라 본 건 정말 졸업하고 처음이었던 듯.
학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고, 보수도 꽤 돼 보였다. 그 건물 그대로 쓸 수야 없겠지. 당시에도 낡아서 무너지기 일보직전인 상태였으니. 동네는 완전히 바뀌었고,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건 경찰청 뿐. 그 외엔 모두, 그야말로 모두 바뀌어있었다.
왜 그런진 모르지만, 난 어렸을 때 살던 곳을 가기가 정말이지 싫다. 심리학에선 이걸 뭐라 설명하려나. 아무튼, 병적으로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왜 그럴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 길이 그 쪽으로 자연스레 갔고, 그냥 그 동네를 이리 저리 돌아다녀봤다. 갑자기 내가 중학생이 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워낙에 학교 건물 외엔 남아있는게 없는 터라, 학교만 딴 곳으로 그대로 이전한게 아닌가 하는 공상과학력(?)이 머릿 속을 타고 넘기도 했다. (영웅본색을 봤던 그 곳엔, 이제 호텔이 들어서 있었다.)
날은 춥고, 더 이상 공허한 망상에 사로 잡히기도 싫고 하여, 어찌 집에 가는게 가장 좋을까 궁리하던 중, 허허.. 바로 앞에 집에 가는 버스가 있음을 발견. 이러려고 발길이 이리 향했는지.
쓰고 싶은건 훨씬 많았는데, 모든 건 다 때가 있는 법. 그 때를 두 번이나 놓치고 나니, 감흥(感興)도, 감상(感傷)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다만 한가지.
12월 32일부터는, 즉 23년엔 좀 더 자주 나가보자. 현대 미술관에도 가보고, 오랜 만에 창덕궁도 다시 한번 가보자.
어차피 장시간 비울 수는 없으니, 반나절 시간을 할애하여 내 빈 공간을, 일상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채워보도록 하자.
아프지 말고.
화내지 말고.
이 두가지 바람만 이뤄질 수 있다면 좋겠다.